1980년 5·18 교훈과 '실패한' 윤 대통령 비상계엄
교수·5·18 관계자들 "5·18 경험한 성숙한 민주 사회의 힘 보여줘"
유혈사태 없이 계엄 해제 '5·18 피 값' 평가도
(광주=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5·18 민주화운동이 남긴 역사적 유산이 윤석열 대통령의 기습적인 비상계엄을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남대 5·18연구소장이자 법학자인 민병로 교수는 4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령은 국회 기능을 마비시키고 국정을 장악해 독재 체제로 가려는 의도가 명백하다"며 "1980년 5월의 상황과 매우 유사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군 당국의 움직임은 1980년 5월과 유사했다.
계엄사령부 지휘에 따라 의회를 해산시켰던 80년 5월처럼 윤 대통령은 군 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장악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계엄군은 가로막힌 국회 출입문을 강제로 열거나 유리창을 깨고 진입했고, 여야 대표와 국회의장 등 주요 인사를 체포하기 위해 그들의 사무실에 진입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계엄포고령을 통해 정치 활동과 집회·시위를 금지하고 언론·출판을 통제한 것도 44년 전과 판박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권력자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국회 앞으로 모인 시민 4천여명과 국회의원 보좌진 등이 필사적으로 계엄군의 진입을 가로막은 사이 국회는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민 교수는 "대법원은 1997년 판결에서 5·18 당시 시민들의 저항을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대항한 정의로운 행동으로 인정했다"며 "역사의 정당한 평가가 이번에는 시민들이 계엄군을 저지한 중요한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5·18을 겪으면서 대단히 성숙해진 시민과 우리 사회의 힘이 짧은 시간안에 비상계엄을 해제하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이번 비상계엄 상황에서는 계엄군을 가로막는 '민간인'을 상대로 강경 진압 작전이 펼쳐지지는 않았다.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키고 폭도로 몰아갔던 5·18 때와 달리 급박한 현장의 상황이 언론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도되면서 강경 대응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5·18 기념재단 유경남 기록진실부 팀장은 "언론과 정보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강경 대응은 더 큰 저항을 불러왔을 것"이라며 "(국회 장악이) 성공했더라도 이 상황을 준엄하게 지켜본 국민들의 거센 저항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유혈 사태 없이 계엄령을 해제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사례"라며 "그 기저에는 5·18의 피 값이 있었고, 그것을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계엄군이 2시간여만에 순순히 철수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5·18 단체 관계자는 "성공한 쿠데타라도 추후 재평가를 통해 처벌한 5·18의 역사가 있다"며 "더욱이 끊임없는 진상규명 노력으로 책임자를 끝까지 역사의 심판대에 세우려 했던 5·18의 지난한 투쟁이 군의 대응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비상계엄을 규정한 법규정을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 팀장은 "현행 계엄법령은 국민이 대통령에게 준 권한을 사적으로 사용하고 그것이 오히려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며 "이를 방지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통령이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시민들의 저항이 정당하다는 것을 헌법에 넣자는 게 5·18 헌법 전문 수록의 기본 의의"라고 강조했다.
i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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